
맨 앞에 적히는 성분
화장품 전성분표는 함량이 많은 순서로 적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제품의 첫 줄은 물입니다. 스킨은 90퍼센트, 로션은 70퍼센트 안팎이 물입니다.
그런데 브랜드들이 광고하는 것은 대개 뒤쪽에 적힌 성분들입니다. 0.1퍼센트 들어간 희귀 추출물을 제품 이름에 넣고, 90퍼센트를 차지하는 물은 그냥 정제수라고만 적습니다. 저희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정제수는 하나가 아니다
정제수라고 표기되는 물은 실제로는 여러 종류입니다. 원수를 어디서 가져오는지, 어떤 방식으로 정제하는지에 따라 잔류 미네랄과 미생물 관리 수준이 달라집니다.
저희가 배합실에서 확인한 것은 물이 바뀌면 제형이 바뀐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같은 레시피인데 물만 바꿨더니 점도가 달라지고, 유화 안정성이 달라지고, 몇 주 뒤 분리되는 속도까지 달라졌습니다.
특히 칼슘과 마그네슘 같은 경도 성분이 문제였습니다. 이 이온들이 많으면 계면활성제와 결합해 제형을 불안정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첨가물을 더 넣게 됩니다. 물의 품질을 낮추면 다른 성분이 늘어납니다.
물을 성분으로 다루기
저희는 세 가지를 바꿨습니다.
첫째, 원수 수질을 배치마다 측정하고 기록합니다. 경도, 전도도, 총유기탄소를 봅니다. 둘째, 기준을 벗어난 배치는 배합하지 않습니다. 셋째, 물을 넣는 시점의 온도를 표준화했습니다. 온도가 다르면 유화 입자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하고 나서 안정제 사용량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성분표가 짧아진 가장 큰 이유는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물을 성분으로 대접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덜 넣기 위해 더 봅니다
자연 유래를 내세우는 브랜드가 흔히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좋은 것을 더 넣으려다 성분 수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추출물 열 가지를 넣으면 각각을 안정화할 보조 성분도 따라 들어옵니다.
저희가 택한 방향은 반대입니다.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것부터 관리해서, 뒤에 붙는 것을 줄입니다. 화려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성분표에서는 가장 정직하게 드러납니다.
전성분표를 읽는 분들께 권하고 싶은 것도 같습니다. 맨 뒤의 희귀 성분보다 맨 앞의 세 줄과 전체 줄 수를 먼저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