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밑에서 시작하기
브랜드 이름을 정하는 데 반년이 걸렸습니다. 후보에 오른 단어들은 대체로 아름다웠습니다. 꽃 이름, 계절 이름, 라틴어에서 가져온 식물학 용어들. 그런데 하나같이 우리가 실제로 하는 일과는 조금씩 어긋나 있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들여다보는 것은 꽃이 아니었습니다. 밭 가장자리에 아무렇게나 자란 풀, 그 아래로 뻗은 뿌리, 뿌리를 감싼 흙이었습니다. 화려하지 않고, 사진이 잘 나오지도 않는 것들. 결국 그것을 그대로 이름에 담기로 했습니다.
초본(草本). 풀 초, 뿌리 본. 나무가 아니라 풀, 잎이 아니라 뿌리에서 시작하겠다는 뜻입니다.
풀을 고른 이유
풀은 한 계절을 삽니다. 나무처럼 수십 년을 버티지 못하고, 겨울이면 지상부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반대입니다. 풀은 매년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 해의 흙과 비와 볕을 가장 정직하게 담습니다.
같은 밭에서 같은 종자를 심어도 해마다 성분 함량이 다릅니다. 저희에게 이건 문제가 아니라 정보입니다. 함량이 낮은 해에는 원료를 더 오래 재웁니다. 좋은 해에는 배합을 덜 건드립니다. 자연이 정한 속도에 맞추는 쪽이 언제나 결과가 좋았습니다.
뿌리를 고른 이유
뿌리는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소비자가 확인할 수 없고, 사진으로 보여주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분의 대부분은 거기서 나옵니다.
보이지 않는 곳을 관리하는 일은 검증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언제 심었고, 어떤 흙이었고, 몇 번 비를 맞았고, 언제 캤는지.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는 브랜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정직함은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천히 흐른다는 것
저희 홈페이지 첫 화면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자연은 천천히 흐르고, 초본도 천천히 흐른다.”
이건 감성적인 수사가 아니라 운영 원칙에 가깝습니다. 신제품을 분기마다 내지 않습니다. 원료 수급이 불안정한 해에는 생산을 미룹니다. 그 결과 품절이 잦고, 성장 속도도 느립니다.
다만 이 속도를 바꾸면 초본이라는 이름이 거짓말이 됩니다. 이름을 반년 동안 고민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름은 약속이고, 약속은 지키기 어려울 때 비로소 이름값을 합니다.